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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131] 종묘 pt.2

안씌 2018. 2. 2. 17:54


태조 이성계는 개경에서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기로 결정한 다음, 


종묘를 먼저 짓고 궁궐을 그 다음에,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벽을 쌓아 도성을 건설한다는 원칙을 정하였다. 


이에 따라 1394년 10월에 종묘를 짓기 시작하여 1395년 9월에 완성하였다. 


창건 당시에는 종묘를 ‘태묘(太廟)’라 하였다. 


태묘가 완성되자 개경에 봉안되어 있던 태조의 조상 4대의 신주를 새로 지은 종묘로 옮겨 모셨다.





종묘의 건립은 유교의 조상 숭배 사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혼(魂)과 백(魄)으로 분리되어 


혼은 하늘로 올라가고 형체인 백은 땅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당(廟)을 지어 ‘혼’을 모시고 무덤(墓)을 만들어 ‘백’을 모시는 형태로 조상을 숭배하였다. 


사당에서는 죽은 조상의 혼이 깃든 신주(神主)를 만들어 제례를 올리며 후손들의 정신적 지주로 삼았다. 


사당중에서 왕실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종묘라고 한다. 


조선 왕조와 관련된 책이나 드라마에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또는 “종사를 어떻게 하려고…”와 같은 표현을 흔히 볼 수 있다. 


종사는 종묘와 사직을 합친 말로 조선시대에 국가의 근본이 되는 것이었다.


동문에서 발길을 돌린 우리는 혼백이 드나든다 하는 신문으로 정전에 들어섰다.




가로가 109미터나 되는 정전은 똑딱이로는 한 앵글에 담기지 않고 


아이폰의 파노라마 기능을 사용해야 그 크기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가운데 본관이라 할 수 있는 넓은 건물이 신실이고 좌우로 창고와 부속실이 있다.






현재 신실에는 제일 왼쪽 1실에 태조로부터 시작해서 27대 순종과 각 왕비까지 모두 49위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처음엔 한 칸이었던 신실이 왕위가 이어져 오면서 증축을 거듭해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천자의 나라인 중국은 7신실에 신주를 모시고 


제후국인 조선은 5신실에 제후를 모셔야 한다는 원칙이 있어서 증축에도 한계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논쟁 끝에 사당을 하나 더 세우기로 한 것이 정전 서쪽의 영녕전이다.










영녕전은 '왕실의 조상과 자손이 영원히 평안하라'라는 뜻을 담고 있다.


원래는 정전에 안치된 신주가 4대가 지나면 옮겨오는 곳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불쌍한 왕들만 정전에서 쫓겨나(?) 오게 되는 곳이 되었다.


자식이 왕이 되지 못 했다든지, 폐위되었다든지 하는 이유로 말이다.





영녕전을 나와 안쪽으로 들어가면 전사청 일원을 지나서 


종묘 뒷길을 걸을 수 있는 산책로가 나온다.


종묘와 창경궁을 연결시키는 도로가 완성되면 이 길로 창경궁까지 갈 수 있다고 한다.



누가 봐도 공무원이 쓴 공사 목적 ㅋㅋ


일제가 뭘 단절시켰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이 도로를 뚫으면 역사가 복원되고 시민 자긍심이 고취된다고 한다.




평생 제사 한 번 안 지낸 나에게 종묘는 신선한 곳이었다.


정전은 사당이라는 목적에 따라 다른 궁궐과 비슷한 듯 하면서도 특유의 장엄함이 있었다.


유럽의 성당처럼 들어가기만 해도 절로 엄숙해지게 만드는 건축기술의 힘을 우리나라에서도 보여 준다.


아직 일본이나 유럽의 관광지에 비하면 디테일에서 아쉬운 점들이 보인다.


집에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거리에 세계 문화 유산이 있다는 것도 특권이다.




<I have a camera>